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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의 각성

· 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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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들

저는 도서관에 가는 것을 좋아했었습니다. 책들이 빼곡히 쌓인 미로같은 그 공간에 담겨있는 것을 좋아했죠. 세계가 걸어온 길, 다음 세대를 위해 격론을 벌이는 고요한 소용돌이의 중심에 있는 기분이 설레였습니다. 다만 부끄럽게도 많은 책을 읽지는 않았습니다. 아주 어릴 땐 대체로 소설을 읽었고,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 책에 관심이 생길 때 즈음엔 수험생이 되어 독서를 등한시 했어요. 대학생이 된 후로는 책보다 공상에 몰두했고, 직장인이 된 지금은 커리어를 위한 공부 자료를 읽는 것이 더 익숙해졌습니다.

또 저는 불교 철학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이건 지금도 그래요. 잠 못드는 밤을 채워넣는 고민들, 삶은 어째서 고통이고 이것을 끊어내는 방법은 무엇인지 궁금했습니다. 불교에는 삼법인이라는 개념이 있는데요.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가 그것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변화하고, 사유하는 모든 것에는 실체가 없으며, 세계의 모든 것은 고통이라는 의미입니다. 서양철학을 제대로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결이 비슷한 의견들이 존재하는 것으로 압니다. 무아지경, 열반. 고통은 집착을 내려놓고 자아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 불교철학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사유합니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인간은 스스로와 세계의 관계에 대해 늘 궁금해합니다. 세계는 무엇인가, 인식이란 무엇인가, 존재의 본질은 무엇인가. 먼 고대의 그리스 철학자들이 설파한 철학의 시초는 이러한 질문에서 시작됐습니다. 한편 동양, 특히 중국에서는 전란의 시기를 돌파하고자 실리적인 물음들을 탐구했죠. 본능에 따라 의식주를 탐하는 것 이상으로 인간은 위대한 질문에 답하려 애써왔습니다. 신학, 과학, 수학 모두 드높은 지식인들이 이뤄낸 탐구의 결과물입니다. 그것들을 따라가고 이해하는 것 만으로도 사유의 즐거움은 충만해지기 마련이에요.

성장지연

최근에 저를 지배한 감정, 혹은 질문이 있습니다. 제가 가진 지식과 지혜가 고여있다는 느낌입니다. 알고 있는 것만으로 세상을 어렴풋이 설명하려는 태도가 습관이 된 것 같아요. 새로운 지식 없이, 가진 정보만으로 추출할 수 있는 논리를 정당화하려는 시도들이 늘었습니다. “이건 사실 이런 거야”, “그건 이럴 수 밖에 없어”. 왜 이런 상황에 머무르게 된 걸까요? 만족스럽지는 않은데요.

지식 습득 전략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뜻과 방향이 없는 배움은 싸락눈을 쌓듯 바람이 불면 흩어져 버려요. 알게 된 것을 더 깊이 따져 묻지 않고, 보이는 것들에 적용하려는 시도가 없는 것이죠. 불교에 대해 궁금했지만 불교개론 책을 조금 읽고는 “대충 안 것 같아”라며 덮어버립니다. 그리고 아주 얇게 덧붙여진 지식의 껍질을 만지며 나는 성장했다고 자위를 합니다. 실제로 그건 너무 얇아서 겉으로 보이는 은은한 빛깔을 제외하면 크기에는 변화가 없는데도요. 요컨대 현학적인 표현을 취사선택 했을 뿐, 근본적으로 더 거대한 사고를 이뤄내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느껴요.

변명은 집어치우고, 어떻게 공부해야 할까요? 무엇을, 언제, 얼마나 하는 것이 좋을까요? 이에 대해서도 요즘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마치 운동선수처럼

학습이란 무엇인가

chess

단어는 점이고 문장은 선입니다. 지식은 면이고, 지혜는 공간이죠. 점을 이어 선을 만들고, 선을 엮어 면을 만들고, 면을 쌓아 공간을 채우는 과정을 공부라고 합니다. 문제는 이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건너뛰려는 시도입니다. 점을 많이 모은다고 공간이 되지 않습니다. 점은 먼저 선으로 이어야 하죠. 웹 기술을 예시로 들어볼게요.

웹 개발을 처음 시작할 때 보통 HTML 과 CSS 로 시작합니다. 화면을 그리는 필수 요소지요. HTML 을 공부할 때는 보통 각종 태그의 종류와 쓰임새를 외웁니다. p 태그는 문단을 표현하는 구나. a 태그는 하이퍼링크를 표현하는 구나. 그리고 이들을 여러가지로 엮어서 화면을 만들어보고, 간단한 CSS 로 스타일을 꾸며봅니다. 그리고 JavaScript 를 배우며 문서가 아닌 본격적인 어플리케이션 개발을 시작합니다.

이 과정에서 배우는 모든 단편적인 지식들은 점입니다. 태그, CSS selector, JavaScript Syntax 는 점이에요. 각각의 세부에 충실하면서도, 독립적으로는 활용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더 큰 맥락이 필요해요. 이들 셋을 하나로 연결하면 웹 어플리케이션 클라이언트에 대한 문장을 만들 수 있습니다.

웹 어플리케이션 클라이언트는 HTML, CSS, JavaScript 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은 마크업, 스타일링, 인터렉션을 담당한다.

이제 우리는 선을 만들었습니다. 다음은 면을 만들어볼 차례인데요. 또다른 점들을 묶어서 선을 만들어보겠습니다. 웹 어플리케이션은 클라이언트만 있지는 않지요. 서버가 존재하지 않는 클라이언트는 (목적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이 시대에는 그다지 쓸모가 없습니다.

웹 어플리케이션은 클라이언트와 서버로 구성된다. 브라우저는 클라이언트를 실행하며, 서버는 클라이언트를 위한 데이터를 제공한다.

여러가지 다른 선들이 있겠지만 생략하고, 이들을 묶어서 한 번 면을 적어보겠습니다.

웹 어플리케이션은 주로 브라우저를 이용해, 웹 상에 존재하는 서버로부터 데이터를 받아 실행되는 프로그램이다. 브라우저는 HTML, CSS, JavaScript 를 이용해 사용자를 위한 그래픽 인터페이스를 제공한다. 서버는 인증, 데이터 처리, 클라이언트 소스 제공 등의 역할을 수행하며 사용자가 데이터 및 다른 사용자와 상호작용할 수 있는 웹 환경을 제공한다.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만족할 만한 면 지식을 만들었습니다. 이 지식을 잘 활용하면 훌륭한 웹 어플리케이션 엔지니어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웹 기술에는 수많은 다른 면들이 있겠지요. 예를 들면 보안, 트래픽, 서버 운영, 성능 등이 있을 겁니다. 이들을 총체적으로 아울러 몇 문장 안에 표현하는 것은 힘들겠네요. 이런 공간적 지식이란 그야말로 “지혜”입니다.

알겠지만은…

간단해보이지만 이렇게 학습을 해나가는 것은 시작하는 사람에게 엄청난 장벽으로 다가옵니다. 저는 요즘 철학에 대한 관심에 다시 불을 붙이고 있는데요. 니체, 헤겔, 러셀 등 (어디서 주워들은)말들이 많이 있지만 뭔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제가 가진 지식이란 점들 뿐이니까요. 이럴 때 크게 두 가지의 태도를 나타냅니다. 한 쪽은 더 폭발적으로 정보를 입수합니다. 시간이 되는 대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지식을 파내려갑니다. 다른 한 쪽은 포기해 버립니다. 배워야 할 것이 너무나도 많아보이는데 지식이 쌓여가는 속도는 기대에 한 참 못 미치니까요.

기대하지 말 것

첫 번째로 제가 세운 원칙은 “기대하지 말 것”입니다. 오늘 나무위키에서 회의주의에 대한 단락을 하나 읽는 다고 단숨에 데카르트주의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영원히 그 경지에 이를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 공부하는 사람은 때때로 공부의 끝 지점에 서있는 나를 상상하곤 합니다. 모든 것을 통달한 존재가 되어 있는 나와, 지금의 나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되는지 가늠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힙니다. 그 거리는 언제나 0보다 크고, 또 줄어드는 것 같지 않습니다. 사람은 성장해 갈 수록 무의식적으로 더 먼 곳에 목적지를 설정하거든요. 이 유혹은 생각보다 너무 강렬해서 언제나 나를 지치게 합니다. 아무리 공부하고 또 공부해도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보이거든요. 그러니까 기대하면 안됩니다. 물론 욕심있게 공부해야 합니다. 하지만 기대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기대하지 않아도 달리다보면 어느새 결승선에 와 있습니다. 달리기를 할 때 가장 집중해야 하는 것은 “얼마나 남았는가”가 아니라 “다음 걸음을 어떻게 놓을 것인가” 입니다.

제 원칙은 “기대하지 말 것”이면서 동시에 “지금만 생각할 것”입니다.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알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이 두 가지만 생각하는 겁니다. 언제 얼마나 더 공부해야 어디까지 알 수 있는 걸까. 그럴 시간이 있는 걸까.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 걸까. 고민하는 대신 지식을 낚아채는 것에 집중합시다. 점을 더 많이 찍고 또 찍는 연습을 하는 거에요. 점들은 언제나 선이 되는 잠재력을 갖고 있어서, 어느 날 그들을 관통하는 선이 보이는 순간 말할 수 없는 통쾌함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집약하기

두 번째 원칙은 “집약하기”입니다. 이것은 노력을 집약하는 것과 지식을 집약하는 것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노력을 집약하는 것은 동시에 너무 많은 것을 공부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아까 철학에 대해 공부하려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철학은 가장 오래된 학문인 만큼 그 역사와 내용이 너무나도 방대합니다. 아주 오랜 철학 이전의 시대부터 최근 논문까지, 몇 천년이 넘는 지식의 보고를 모든 면에서 동시에 공략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시작점을 정하고 그곳을 뚫어내야 합니다. 저는 우선 서양철학사 전반에 대해 훑어본 뒤에 시간 순으로 공부할 생각입니다. 아마 그리스 철학부터 시작하게 되겠지요. 근대, 현대 철학에도 궁금한 것이 너무나 많지만 당분간은 고대 철학에만 집중할 생각입니다. 후대의 학문은 나중에 공부해도 전혀 문제되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공부할 것이니까요.

또, 지식을 집약해야 합니다. 호메로스부터 플라톤을 거쳐 중세로 넘어가기까지 저는 아마 엄청나게 많은 이름과 개념을 만나게 될 겁니다. 이들을 일일이 외우고 나열하는 건 선을 만들지 못하는 행위입니다. 지식을 습득할 때는 잠시 시간을 내어 무엇을 배웠는지, 왜 그들을 함께 배우게 되었으며 서로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정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걸 하지 않고 지식만 쌓아가면 처음 말했듯 바람에 날아가버리는 모래 같은 지식들만 남습니다. 철학은 왜 탄생했고, 그들은 왜 서로의 탐구를 지적했으며, 이들이 그리스도교가 본격적으로 활동하는 시기와 어떻게 상호작용 했는지 큰 줄기를 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나오는 명문장 몇 구절을 외우는 건 지금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입니다.

…전속력으로!

마지막 원칙, 혹은 원리는 “전속력으로”입니다. 공부는 대단한 끈기를 요구하는 행위입니다. 그 과정을 온전하게 즐길 수 있는 강력한 탐구정신을 가진게 아니라면, 대부분의 공부는 그 끝에 찾아오는 “보상”을 위해 하는 행위가 됩니다. 제게 철학 공부는 과정 그 자체를 즐기기 위한 취미일 뿐이지만, 웹 기술 공부는 그것을 너머 (혹은 그에 더해) 커리어의 성장이라는 보상을 바라고 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첫 원칙에서 이야기 했듯 공부를 통한 보상은 정말 뒤늦게 찾아오고, 어쩌면 영원히 찾아오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활용할 곳이 없는 지식이 되어버릴 지도 모르니까요. 예를 들자면 AI 시대의 출현으로 쓸모 없어져버린 수많은 지식, tactic 이 있겠죠.

저는 가장 쉽게 단기적인 보상을 얻는 방법은 “전속력 공부”라고 생각합니다. 성취감만큼 사람을 중독시키는 건 없는 것 같아요. 중독적인 성취감을 만들기 위해 전력으로 공부해야 합니다. 성장곡선을 최대한 가파르게 만들고, 새로운 것을 배우며 성장해나가고 있다는 감각을 항상 날카롭게 다듬어야 합니다. 하지만 전속력이라는 건 말이 쉽지 실제로는 참 어려운 일 같아 보입니다. 속도를 높이려면 무게를 가볍게 해야겠죠. 공부의 영역에서 무게란 부담, 즉 난이도이고요.

가장 쉬워보이는, 가장 가까운 공부부터 밟고 나아가는 것이 좋습니다. 프론트엔드 기술에만 집중해온 제가 당장 내일부터 Kubernetes 공부를 시작하는 건 많이 어렵습니다. 그나마 가장 가까운 API 서버 구축이나 DB 구축부터 시작해야겠죠. 혹은 네트워크에 대한 공부를 하는 것도 괜찮구요. 요점은 기존 지식과 새 지식 사이의 간극을 최대한 좁혀서, 빨리 뛰어넘을 수 있도록 경로를 잘 구성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완전히 새로운 지점에서 공부를 시작하는 것도 재미있겠지만 속도는 그만큼 안 나올 거에요.

전쟁을 치루는 것처럼

위 원칙들을 종합해서, 학습에 대해 제가 가진 이미지란 전쟁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전술에 가깝습니다. 다분히 이성적이고 이기적인 방식으로 지적 탐구심을 공략하는 것입니다. 배우고 성장하여 더 나은 나를 만들기 위해 극단적으로 합리적인 선택만을 강요합니다. 거기엔 그 어떤 도덕적이거나 규칙적인 무언가도 필요하지 않은 것이지요. 성장을 위해 더 다른 고민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출발해요. 아주 집요하고 집착있게, 노련하고 민첩하게 나를 깎고 덧붙여 나가는 겁니다.

그나저나 왜

학습에 대한 방법론은 왜 중요한 걸까요? 저는 최근 매우 분명하게 깨달았습니다. 인간이 일평생 끊임없이 하는 행위는 다른 무엇도 아닌 학습 뿐이라는 것을요. 진부하고 뻔한 말이죠. 깨달았다고 스스로 느낀 순간 그 이전에도 이 문장에 대해서는 동의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걸 분명하게 깨달은 뒤에 다시 읽은 격언의 무게는 전혀 다르게 느껴졌어요. 학습, 공부 그 자체에 대한 고민 없이는 자유롭게 뻗어나가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하던대로의 공부만으로는 변화하는 세계에 발 맞춰, 그보다 빨리 뛰어나갈 수 없어요. 언제나 최고의 전략을 구상하며 공부하고 앞서나가야 하죠. 배움의 과정 그 자체를 즐거워 하는 태도는 당연하고요.

행복을 위하여

happiness

방법론에 대해 이야기 했지만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결국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 삶의 총체적인 에너지 소비는 행복을 위합니다. 불행을 추구하는 행위같은 건 없어요. 얼핏 그렇게 보이더라도 그건 단편적인 이해일 뿐 궁극적으로는 그 개인의 어떤 (어쩌면 왜곡된) 행복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학습도 마찬가지에요. 나에게 주어진 무기란 학습하는 것 단 하나 뿐입니다. 학습할 수 있는 두뇌만으로 나는 삶에서 행복을 건설해야 하지요. 석가모니 또한 아무것도 없이, 세계를 관찰하며 사유 학습한 결론으로 행복(=고통으로부터의 탈피)을 뒷받침하는 찬란한 논거를 완성했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최고로 전략적이고 이기적인 학습은 행복마저 계산에 넣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삶에 행복을 가져다주는 다른 가치들을 모두 파괴하는 학습은 전혀 전략적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맹목적일 뿐이에요. 학습은 그 자체로 목적이지만, 동시에 삶을 위한 수단입니다.

제가 가장 사랑하는 문장으로 학습에 대한 짧은 이야기를 마무리해봅니다. 오롯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학습과 사유 뿐이고, 그것을 가장 잘 하기 위한 노력은 행복을 가져다 주리라고 믿습니다. 다른 모든 것은 언젠가 변하고 무너질 흔적들 뿐이지요.

자등명법등명(自灯明法灯明): 스스로를 섬으로 삼아 나아가라. - 석가모니